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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끌림_을 보고 쓰는_나의 지독한 주절거림

어니언 (국내산) 2020. 9. 2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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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책을 인용하며 글을 씁니다. 

onion7321.tistory.com/67?category=847926

 

지독한 끌림_지독했던 그의

 기본적으로 내가 이용하는 서점은 교보와 알라딘이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산다. 교보는 책을 실물로 보고사는 경우가 많고, 알라딘은 인터넷으로 책을 사거나 혹은 e북을 사기도 한다. 요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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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표시『』

 

 저자의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진가로서 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어떤 사진을 찍을 것인가'였다.』

 

 나는 중학생 때 이런 생각을 늘 품었었다. 정말로 작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꿈 많고 야망 있던 푸릇한 아이였지만, 당시의 답은 '많은 것을 알자.'였다. 아는 게 없었으니 어떤 작가가 될지도 몰랐던 것이라서, 그림은 계속 그리고 살고 싶었던 것 뿐 뚜렷함이 없었다. 어차피 그림의 테크닉은 시간이 지나면 늘 테니, 지식을 쌓자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 공부는 하기 싫어서 그냥 책이나 검색 혹은 미술관 등을 그때부터 조금씩 다녔던 거 같다. 중학생이다 보니 행동반경은 넓지 못해서 지금처럼 지도가 잘 되어있던 것도 아니고, 어디에 갤러리가 밀집되어있다는 정보 조차 몰랐다. 그리고 집과 학원을 오가기도 바빴던 터라 주말이면 시간을 내서 조금씩 움직였던 거 같다. 고등학생 때는 더 방황이 심했던 것 같다. 겉보기엔 문제없던 학생이었지만 항상 내 안은 태풍과 해일이 몰아치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 

 

 대학생이 되었다. 전보다 넓어진 행동반경으로 많이 돌아다니며 배웠다. 더 많은 작품을 보고 더 많은 책을 읽었다. 그외도 많은 것들을 하며 생각이 조금씩 변하면서, 내 그림도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세상에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그것이 내 작업의 방향성이 되었다.

 

 정봉채 작가(호칭 생략)의 사진을 보면 그는 수행의 길에 있는 것 같다. 혹은 이미 깨달음에 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수행자나 마찬가지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겸손하고 한없이 작은 사진가가 되는 것, (후략)』

 

『우포늪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처럼 내 사진을 보는 이들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그것이 내가 오래도록 한결같이 추구해온 내 사진의 의미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의 겸허한 마음이 내가 아직도 갈길이 멀었구나 싶었다.

난 아직도 15살 그대로임을... 그가 찍어 놓은 자연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오랜만인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의 글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늪으로 간다.』

 

ㅡ처럼, 보이지 않단 것, 들리지 않던 것, 그것이 보인다는 메시지가 곳곳에 있다. 

늘 같은 곳이 같은 곳이 아님을 깨닫는 것.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담담히 써놓은 저 문체가 가슴을 저몄다.

 

 

『(전략) 나는 왜 이 늪가를 떠나지 못하는가. 모든 예술은 작가의 욕망의 표현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의 근원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하기에 욕망하고 욕망하기에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조금 생각을 해 볼 법한 내용이었다. 

나는 왜 이 그림을 떠나지 못하는가... 역시 욕망이겠지. 하지 않고 있음에도 난 역시 갖고 있는 미술도구를 못 버리겠다. 오히려 가끔 궁금해서 재료를 사 보기까지 하는 거보면 역시 근질거리고 있다. 욕망일까. 집착일까.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가 생각난다. 『"끈질김"과 "얽힘"은 다르다』고 어릴 때는 내가 그림에 대한 "집착"과 "얽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림을 잠시 둔지도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그저 인생이였다. 늘 함께 있던. 그리고 나의 최대의 소통 도구였다.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역시 난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게 가장 편할지도 모르겠다. 아직 할 말을 다 못 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구천을 떠돌듯이. 욕망. 그래, 이것은 사랑이구나. 다시 한번 알아가게 되는 게 있다. 지금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사진이 과연 예술인가?

 피사체를 복제하는 행위를 창조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들에게 답한다.

 (중략)

 그것이 나의 사진이 추구하는 궁극이다.』

 

전부 쓸 수 없어 중간을 비워놨다. 부디 읽어서 중략된 부분을 보셨음 좋겠다.

책 소개 페이지에서도 적어놨지만, 나는 그의 사진이 '아름답다'라고 말했고 그가 추구하는 궁극에 끄덕여졌다. 그의 사진은 그 궁극을 추구함이 깃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든 사진이든 작가가 추구하는 것이 담길 수밖에 없다. 창작에 세계엔 연출이 있다. 글이든, 그림이든, 무엇이든 행위자가 하고 있는 것에 "의도"를 담는다면, 그냥 그저 보기 좋은 연출만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것은 창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사물도 같은 위치에서 찍더라도 다른 풍경을 연출할 수 있는데, 조금 각도를 틀으면 또 다른 풍경이기에, 그것을 캐치해 의도를 위해 부단히 움직였다면 그것에 대한 노력은 무엇인가 말이다. 

 

 만약 저 질문을 한 사람에게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시에 같이 사진을 찍어도 분명 다르게 나올 것임을. 사람들은 저마다 같은 것들 봐도 같은 걸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했음 한다.

 

나도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풍경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그냥 그곳이 주는 아름다움을 찍는 걸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그 안에 집착은 딱히 없다. 내 사진을 보면 아마 대략 알지도 모르겠다. 그와 같은 깊은 맛은 있지 않는 사진이다. 그저 지금의 풍경을 찍는 것. 지금의 공기를 담고 싶다는 정도. 다시 한번 사진에 대한 깊이를 느껴본다.

 

왠지 다음에 사진을 찍게 된다면, 좀 더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그럴 예정이었지만, 읽으면서 다시금 많은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기대감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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