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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박] 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_⑤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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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박] 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_⑤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어니언 (국내산) 2021. 10. 10.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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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박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비공식 준말입니다. 저로 비롯하여 많은 분들께서 '국박' 혹은 '국중박'이라고 부릅니다.

 

 제 전공은 서양화입니다. 최대한 아는 내용과 약간의 검색을 통해 알게된 사실을 잘 버물려 최대한 간단한 설명과 본 전시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아무리 감상을 이야기 한다 한들 실제 보러 가시는 것을 더 추천드리겠습니다.


 이전 글:

[국박] 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_④ 떨어지는 잎사귀에 해와 달 (tistory.com)


 

 

 

  박물관 내 설명]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고려 11-12세기

 청동

 보물 제1414호

 

 압도적인 크기와 절제된 우아함

 향로는 불교의식에서 잡귀나 잡념을 없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하며 그 형태가 다양하다. 규모가 매우 큰 이 향로는 문양 장식이 없어 간결하며 결제된 우아함이 독보적이다. 뚜껑에 우뚝 솟은 불길 모양 장식은 향로에 세련된 품위를 더해준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고려 태조 어진을 모신 봉업사에서 제작된 향로임을 알 수 있다.

 

 

 

 

 

 

 

 

 

  박물관 내 설명]

 

 '경선사'가 새겨진 청동북

 

 고려 1218년경

 청동 (구리 64.9% 주석 26.4% 납 7.1%)

 보물 제 2008호

 

 고려 무관들의 장수와 승진 소망이 담긴 청동북

 청동북은 사찰에서 의식을 치르거나 시간을 알릴 때 사용된다. 청동으로 타악기를 만들 때 주석의 함량을 늘리면 소리가 맑고 길어진다. 현제 이 북의 주석 함량은 26% 정도이다. 이 북 옆면에 소리를 울리게 하는 구멍이 있고 제작 정보가 담긴 글이 세겨져 있다. 고려 무관들이 장수와 승진을 기원하면서 이를 제작하여 경선사에 바쳤음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청동북 옆면에 있는 글

 옹호군 대정 이인간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정성으로 발원하였다. 이번 생에서 모두 장수하고 지위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기를 바라며 금구 1개를 만들었다. 경선사에 바친다.

 

 

 

 

 

 

 

 

  박물관 내 설명]

 

 '사복사'가 새겨진 향완

 

 고려 1218년

 청동에 은입사

 

 새로운 문양으로 장식된 향완

 향완은 입구에 넓은 테두리가 달린 원통형 몸체와 높은 받침으로 구성된 향로로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향완 중에는 문양을 선으로 음각하고 은실을 끼워 넣는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된 것이 많다. 이 향완의 몸체 중앙에는 범자가 있고 새롭게 등장한 여의두무늬가 이를 에워싸고 있는데, 향완 장식 문양의 기준작으로 중요하다.

 

 

 

 테두리 안쪽에 있는 글

 정우 6년(1218) 무인년 삼월 길일에 삼가 쓰다. 향로와 향합을 사복사에 회사하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왕세자의 수명이 길어지기를 왕도의 불제자 염씨가 함께 기원하며 자녀의 평안과 집안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백일기도를 올린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들을 감상하던 당시에는,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경선사'가 새겨진 청동북>, <'사복사'가 새겨진 향완>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향완, 섬세하게 새겨진 글자와 문양의 청동북, 은입사銀入絲의 정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정교함의 극치 향완. 정말 신기하게 작품을 감상했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게 가장 좋을까 했습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어느 사찰에 이름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찰 내에서 만들었든 혹은 기원하는 마음으로 기증을 했든 공양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고려는 다 아시다시피 불교국가입니다. 태조 이래 국교로 지정되었으며, 태조 왕건의 유언인 훈요 10조에도 불교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삼국통일의 위업이 모든 부처의 보호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둘째, 제멋대로 절을 더 창건하지 말 것.

여섯째,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10개의 조항 안에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이 불교에 관한 내용 일 정도입니다. 그만큼 고려는 삼국시대의 전통(불교)을 이어받아 성장했습니다.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

 

 11-12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이 향로는 태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봉업사에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11-12세기는 고려의 초기(918~1170)와 중기(1170~1231) 사이입니다. 고려 중기는 무신 정권기로 무신들이 문신을 제거하고 관직을 차지했을 때입니다. 

 

 이건 제멋대로의 상상이지만, 이것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흉흉하던 시기에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소설을 써봅니다.

 봉업사에는 태조의 어진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태조 왕건과 긴밀히 연관이 되어있을 터이고 그 기틀을 부신 정권이 들어왔기 때문에 태조가 나라의 기틀을 세웠을 때로, 초심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며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박물관내의 설명에선 짧게 "향로는 불교의식에서 잡귀나 잡념을 없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곧, 향은 잡귀나 잡념을 없앤다와 상통할 수 있습니다.

 

 관내 설명은 짧게 해야 하니 다 담지 못했겠지만, 불교 내에서는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그 향기가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 세계까지 널리 퍼진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부처님들이 향기를 맡고 사바세계에서 법문을 듣거나 공양하는 이들을 실제로 보고 알게 되는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바세계와 부처님이 계시는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로는 그 매개체의 장비(?) 혹은 도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전화기는 향로이고 통신줄은 향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 계속 흉흉했으니; 김보당, 조위총의 난, 망이ㆍ망소이의 난, 김사미의 난, 만적의 난, 향을 태워 나라의 기틀을 잡았던 태조가 있을, 혹은 부처님이 계실 세계까지 전달되어 태조가 혹은 부처가 그 향을 맡고 고려를 지켜봐 달라는, 그리고 그 태조의 마음이 다시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경선사'가 새겨진 청동북

 

 1218년경 만들어졌다는 청동북.

 위에서 언급된 무신 정권기인 고려 중기(1170~1231년)에 해당됩니다.

 

 1218년 경, 당시는 (고려) 고종의 시대였지만, 이미 최충헌(1149~1219)이 권력을 잡은 후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사후에도 최 씨 일가가 약 40년에 걸쳐 권력을 독점함)

 최충헌은 이미 왕을 4번; 명종, 신종, 희종, 강종,이나 갈아치웠습니다. 최충헌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하니 이때도 최충헌과 그의 아들(최우)이 권력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관내 설명에서는, 고려 무관들이 장수와 승진을 기원하면서 이를 제작하여 경선사에 받쳤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옆면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정성으로 발원하였다며, 이번 생에서 모두 장수하고 지위가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기를 바라며 금구 1개를 만들어 경선사에 받쳤다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 상상이지만, 이런 말 하기 뭐한데, 이들은 아마 최씨 집안과 연이 없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고려를 꽉 잡고 있던 최씨 일가 혹은 그 일가의 주변이라도 조금의 연이 있었더라면 혹은 돈이라도 많으면 청탁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연도 뭣도 믿는 곳도 없어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돈이 없다고 한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아서 발원했다고 되어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흙수저란... 헬고려

 

 

 

 

 '사복사'가 새겨진 향완

 

 위의 청동북은 1218년 '경'이라고 되어있는데 반해, 이 향완은 1218년이라고 명확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은 관내 설명에 있는데, '정우 6년(1218) 무인년 삼월 길일에 삼가 쓰다.'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복사에 회사한 이유로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왕세자의 수명이 길어지기 바라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왕도의 불제자 염씨가 함께 기원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왕도의 불제자 염씨"가 가장 궁금한데 누구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한 번 더 상상을 해봅니다. 위의 청동북에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썼듯이 당시는 참으로 살벌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각종 난들이 발발했으며, 임금은 단 한 명의 무신에 의해 4번이나 바뀌었으니 왕도에 살면서 그 누구보다 더 가까이 보고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럴 때에 나라의, 그리고 백성과 왕세자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면 왕족이었거나 (당시 폐위도 많이 당했으니) 왕실과 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백일이라는 정성을 드려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것은 저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으나, 저는 이 기도자가 그리고 염씨가 여성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나는 왕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꼭 부모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염씨가 '함께'기원한다"는 점에서 염씨 이외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인데, 그 누구를 숨기고 염씨를 놓았다는 것은 마치 '볼트모어'와 같은 심정입니다. 

 즉, 염씨는 그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상궁'같은 위치의 분이 아니셨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자녀의 평안과 집안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라는 부분에서, '자녀의 평안'역시 부모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며, '집안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자신은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풍깁니다. 고려시대가 조선시대보다 비교적 여성의 자유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분이 높을수록 여성은 보통 관여를 많이 안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이때는 왕(고종)조차 눈치 보며 지냈을 터이니, 왕실의 여성은 더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는 염씨라고 하는 점인데, 보통 남성들이라면 이름을 새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냥 성姓만 쓴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며 "같이" 기도한 사람도 여성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보통 왕실의 사람이라면 이동시에도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었을 테니까요. (특히 가까이엔 여성으로)

 

 

 

 

 

 다시 봐도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우리 유산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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